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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연극

‘統營 및 固城五廣大’의 역사적 유래

by Park, Hongjin 2009. 10. 14.

‘統營 및 固城五廣大’의 역사적 유래


1. 오광대 놀이란? (槪略)

오광대 놀이는 경상남도 낙동강 상류 초계 밤마리에서 비롯된 탈놀음의 한 분파로-산대놀이 계통의 영남형으로 보기도 한다-밤마리 장터의 대광대패(竹廣大牌)들에 의하여 점차 각처로 퍼져나간 것으로 신반,의령,진주,산청,창원,고성,통영,김해,가락,고성,거제,가산 등 광범한 지역을 망라했던 놀이이다. 이처럼 널리 이 놀이가 전파될 수 있었음은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패가 각지로 유랑연희 하였으며 또 이 놀이를 밤마리 장터에서 보고 간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고장에서 시작한 데서 연유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현재는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통영 오광대놀이와 고성 오광대놀이의 2종이 전승되고 있는 형편이며 그 외 진주 오광대놀이와 마산 오광대놀이,가산 오광대놀이등이 재담을 전하고 있다.

오광대놀이의 내용은 중부지방의 산대놀이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오히려 토착종교의 잔존인 축사연상(逐邪延祥)(1)의 주원(呪願) 등이 돋보이는 것으로 보아 산대도감놀이 형성 초기의 분파로 보여지는 것이다. 조선왕조 인조(仁祖) 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도감놀이가 폐지됨에 따라 일어난 탈꾼들의 분산은 개인 또는 수인집단(數人集團)에 의한 향토화·개성화로 진전되면서 오광대놀이라는 민중놀이로 정착·형성되어지는 계기로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광대란 명칭은 오방오색설(五方五色說)(2)에 의한 오(五)로서 진주 오광대놀이의 경우 첫 마당에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가 나오는 예를 들 수 있다.

-축귀(逐鬼)의 오방신장에서

-그 오방신장의 역할을 오양반(五兩班)으로 바꾸어 놓고,

-또는 다섯 문둥광대로 등장시키거나,

-또 다시 오양반을 오광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겠다.

한편 광대란 명칭이 붙은 데 관하여는 광대의 어의(語意)를 ‘얼굴,환칠한 얼굴,가면,가면연희자’등으로 해석하여 이런 어의를 바탕으로 가면무극의 등장인물로 지칭되면서 오(五)와 결합하여 그 등장인물이 노는 가면무극 자체의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라는 해설과 상류계급인 양반을 여지없이 모욕하는 놀이 내용의 성격상 제목을 일부러 오광대라 하여 광대 자기끼리 욕설하는 희작(戱作)임을 강조 양반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연출하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한 것으로 당시 사회적 배경에 따른 의식적인 작의(作意)로서 광대를 사회적으로 하층계급인 연희배우라는 전제로 고찰한 해설이 있다.

2. 어디에서 왜

오광대놀이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낙동강변 초계 밤마리장터의 대광대패들에 의하여 시작되어 점차 각지로 전파되어 거의 경남 내륙과 해안선 일대의 각지를 망라하게 되었다.

밤마리는 지리적으로 경상남도의 중심지가 되었던 동시에 이 지방의 젖줄이었던 낙동강의 동강(東江) 중류에 위치하여 상역(商易)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1900년 초 이전에 있어서는 경상도지방뿐만이 아니라 전라도와 충청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교통과 무역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라 한다. 상주하는 흥행단체(광대패,대광대패,남사당패 등)가 있을 정도로 흥청거렸던 곳이다. 따라서 특정한 민중들의 오락수단이라고는 없었던 당대에 ‘오광대놀이’라는 탈놀음을 비롯해 <죽방울받기>,<무동놀이>,<솟대타기> 등은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고장의 세도가들은 접장제도(接長制度)(3)를 허용함으로써 강력한 통제력을 갖는 시장운영기구를 만들게 하여 도박장과 각종 오락적 흥행물을 적극 장려했던 바 그 중에서도 밤마리의 ‘대광대패’는 그들의 비호속에 클 수 있었으며,경상도 일원을 자유로이 떠돌 수 있을 만큼 이름이 나게 되어 그 영향력은 각 고장의 오광대놀이 형성에 영향을 준 강력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3. 상인들의 활동과 탈춤의 관계

낙동강의 河港 또는 河市로서 밤마리는 인근지방의 물산의 집산지일 뿐더러 특히 여름철 함양,산청 쪽의 삼(베)과 해안지방의 어류와 타지방의 미곡 등과의 교역을 위한 난장을 트게 되면 거상들이 모여 대광대패들에게 비용을 주어 며칠씩 오광대놀이를 놀게 하였다고 한다.

이조 후반기의 私商들의 활동과 탈춤의 관계는 사상들의 활동에 따른 탈춤의 분포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사상들의 활동은 자신들의 근거지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중요한 교역로를 따라 전국의 시장에 뻗쳐 있었으며 그러한 곳에는 탈춤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지리적 여건에서 직업적인 가면연희자들은 패트론인 사상들의 후원을 받았고 비직업적인 연희자(下吏輩) 들은 관가의 힘을 빌어 가면극이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4. 누구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는가

약 7,80년전(1961년 현재)에 시작되었다는 통영오광대는 처음 義興契(70여년전)로서 유지되었고 의흥계 노인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현우(양반役), 박재규(말뚝이역), 이순오(할미역), 이화선(양반역), 이마치(작은어미역), 최기만(문둥이역), 박무일(검정양반역), 조열규(비틀양반역), 백성노(紅白哥양반역) 들이다. 의흥계 다음은 장용기가 주동이 된 蘭社契(50여년전) 노인파 들이었고,이에 속하는 사람들은 박정대(말뚝이역), 신옥서(곰보양반역), 배재일(비틀양반역), 조열규(비틀양반역), 박인진(장고), 박석근(장고)등이다. 40여년전 장재봉翁이 29세시 중년파로서 오정두(영노역), 채구생(조리중역), 김진수(사자,둘째양반역)등과 함께 春興契를 시작하여 난사계의 오광대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자신이 통영오광대의 마지막 명연희자였던 故장재봉翁(1896-1966)의 맏형 장진국은 비비양반과 할미역을 잘 하였고 중형인 장용기는 말뚝이역을 잘 하여,이 중형에게서 막내동생인 장재봉은 배웠다고 한다. 선배들에게서 담뱃대로 얻어맞아 가면서 배웠다는 그는 문둥이춤의 명수였고 말뚝이와 영감역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주석
(1) 사악한 것은 물리치고 상스러운 것은 받아들인다는 뜻
(2) 東洋五行說의 오방(동,서,남,북,중앙) 오색(청,백,적,흑,황)
(3) 각 고을의 우두머리를 추켜세워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고을을 다스리게 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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