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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연극

놀이와 제의

by Park, Hongjin 2009. 10. 8.

놀이와 제의

박 홍 진

제의란 어떤 표출이며, 극적인 표현이며, 형상화이며, 대리적 현실화이다. 철철이 되풀이되는 성스러운 축제 때에는 그 공동체 전부가 봉헌 의식을 통해서 자연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사건들을 경축한다. 그러한 의식 속에서 계절의 변화,별자리의 바뀜,곡식의 자라고 익음,사람과 짐승의 출생과 삶과 죽음이 표현된다. 레오 프로베니우스(Leo Frobenius)(1873-1938, 독일의 민족학자. 문화권의 개념을 제창했다.)가 지적하였듯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의식속에 새겨진 자연의 질서를 놀이하였다. 프로베니우스의 생각에 의하면,고대인들은 맨 처음엔 동물 세계와 식물 세계의 현상을 의식 속에 받아 들였고,그 다음엔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 대한 관념,달과 해(年),태양과 달(月)의 운행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성스러운 놀이 속에서 존재의 이러한 위대한 진행 질서를 놀이하고,이 놀이 속에서 또 이 놀이를 통하여 재현된 사건들을 새로이 현실화 또는 재창조함으로써 우주 질서의 유지를 돕는다는 것이다. 프로베니우스는 이 “자연을 놀이한다”는 것으로부터 좀 더 광범위한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그는 그것을 모든 사회 질서와 사회 제도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러한 제의 놀이를 통하여 미개사회는 미개한 형태의 정부를 갖게 된다. 왕은 태양이며,왕권은 태양의 운행을 상징한다. 평생토록 그는 “태양”을 놀이하며 마지막엔 태양의 운명을 겪는다. 즉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 의하여 제의 형식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의적 국왕 시해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기초로 하는 전체 해석을 얼마만큼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원시시대의 자연 의식(意識)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처음엔 우주 현상의 경험을 표현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놀이의 형식 속에 그러한 현상들을 표현하여 형상화하게 된 정신적인 과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프로베니우스가 이것을 선천적 놀이 본능 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안이한 가정을 버린 것은 옳은 일이다. 그는 말하길 본능이란 용어는 “실제의 문제에 당면하여 무력함을 인정하는 미봉책”이라고 하였다. 똑같이 분명하게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이유로 그는 모든 문화 발전을 ‘특별한 목적’으로 ‘왜’또는 ‘무슨 이유’를 가지고 설명함으로써 문화 창조 공동체의 목을 찌르려는 경향을 낡은 사고의 흔적이라고 배격하였다. 그는 그런 관점을 “가장 지독한 인과율의 횡포”,“낡아 빠진 공리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문제의 정신적 과정에 대한 프로베니우스의 개념은 대강 다음과 같다. 고대인들에게는 아직 표현되지 않은 삶과 자연의 경험은 사로잡히고,전율하며,황홀경에 빠지는 ‘사로잡힘’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창조적 인간이나 아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이 사로잡힘의 상태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운명의 계시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리듬의 현실은 인간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고 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 자율적인 작용에 의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행위 속에서 표현하도록 만든다.” 결국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정신의 필연적인 변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삶과 자연의 현상에 의한 전율 즉 “사로잡혀 있음”은 반사적인 행위에 의해 시적 표현과 예술 형식으로 압축된다.

프로베니우스에게는 놀이와 표현은 결국 어떤 다른 것,곧 우주적 사건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것”을 표현하는 데 그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우주적 사건을 극화시킨 것이 놀이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에게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

우리는 고대 사회의 놀이가 어린이나 동물의 놀이와 같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한 놀이는 놀이 고유의 특성인 질서,긴장,운동,변화,장엄,율동,환희 등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단지 나중 단계의 사회에 가서야 놀이 속에서 또는 놀이에 의하여 표현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 즉 우리가 ‘삶’이나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관념이 놀이 자체와 연관을 맺는다. 그러자 전에는 말을 사용하지 않던 놀이가 이제는 시적 형태를 지니게 된다.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놀이의 형태와 기능을 통해서 사물의 성스러운 질서 속에 파묻혀 있는 인간의 의식이 최초의 최상의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표현을 찾는다. 점차적으로 성스러운 행위의 의미가 놀이 속에 스며들고 제의가 여기에 융합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놀이이고 놀이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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