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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연극

서양연극사 요약2

by Park, Hongjin 2009. 10. 6.
예전에 '서양연극사' 공부할 때 오스카 브로케트의 [연극개론]을 정리해 놓았던 글인데 사실주의 연극에서부터 상징주의 연극까지 핵심사항을 정리해 놓은 내용이다.

사실주의(realism) 연극


사실주의는 계몽주의 이래로 새롭게 대두한 19세기말 이성과 과학의 시대 조류 아래 콩뜨의 과학적 실증주의의 방법론과 마르크스, 다윈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문학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이다.
연극에 있어서 이것은 에밀 졸라의 <Therese Raquine> 서문으로 선언되어졌다. 졸라는 이 글에서 연극은 마치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험하듯 한 인물이 특수한 환경에 처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관찰, 기록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졸라의 연극론에 영향받아 앙드레 앙트안느는 <Theatre Libre>를 설립하고 새 연극의 중심지로서 사실주의 연극운동을 펴나갔다. 그는 당시 공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던 입센, 스트린드베리 등의 선구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공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실주의 연극 공연 양식을 확립하였다.
한편 그의 영향을 받아 유럽 각국에서 소극장 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오토 브람이 <프라이네 뷔네>를 영국에서는 J.J. Grein이 <Independent Theatre Society>를 건립하고 각기 사실주의 연극을 주도하였다. 이로써 사실주의 연극은 전 유럽에 정착되게 됐다.
사실주의 연극론의 효시는 졸라의 앞서 서문보다 한 세기나 먼저 나온 디드로의 <연극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연극의 완벽함은 행동의 모방에 있으며 관객 스스로가 기만될 수 있도록 정확해야 한다고 했으며 인과법칙을 예술에 적용시켜 자연과 예술을 연결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연극=현실(자연)'이라는 극적 일루젼(illusion)과 과학적 결정론을 연극의 지상과제로 삼았으며 이는 곧 사실주의 연극의 본질을 이루는 논리였다.
사실주의 연극의 공연 양식은 삭스-마이닝겐 극단의 선구적인 작업에 힘입어 앙트안느와 그의 <Theatre Libre>에 의해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는 연기자가 실생활에서와 같이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였으며 장치도 4면벽을 모두 설계하였고 실제의 물건을 무대 도구로 사용하였다. 또한 조명도 시간, 절후에 따른 실제의 광원을 모사하고자 애썼다. 그는 이러한 모든 공연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극적 일루젼을 이루도록 연출의 감독하에 전 제작 과정에서 사실주의적 공연 양식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앙드레 앙트완느의 'The
ater Livre'와 소극장 운동


앙드레 앙트완느와 그의 '씨어터 리브르 Theatre Livre'는 곧 사조로서의 사실주의 연극의 정착과정이었다. 사실주의는 19세기말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이 시대는 과학과 이성의 대두 아래 콩트가 주창한 관찰·실험의 새로운 방법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다윈의 종의 기원 등에 의해 주장되어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의 산물은 유전과 환경에 지배 받는 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형성되게 되었다.
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과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예술에 적용시키고자 한 것으로 연극에 있어서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깽의 서문을 통하여 선언되어졌다. 즉 그는 마치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험하듯 한 인물이 특수한 환경에 처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을 관찰-기록하여야 한다고 했다. 앙드레 앙트완느는 이러한 졸라의 자연주의 선언에 자극받아 1887년 'Theatre Livre'를 설립하여 당시 기성극단이 외면하였던 입센, 스트린드베리, 하우프트만 등의 문제작을 공연함으로써 1894년 이 극장이 문을 닫을때까지 새 연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앙트완느는 이들 새로운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본격적인 사실주의 공연 양식을 확립하여 갔다. 즉 연기자는 일상생활에서와 같이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였으며 장치는 실생활에서와 같이 4면을 모두 설계하였고 진품 무대 도구를 사용하였다. 조명도 실제의 광원을 충실히 모사하고자 애썼으며 이러한 모든 공연 요소를 엄격히 통제하였다. 이러한 앙트완느의 새로운 연극 운동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쳐 유럽 각국에 이와 비슷한 소극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오토 브람이 관리와 지식인들의 도움을 얻어 베를린에 '프라이에 뷔네 Freie Buhne'를 세워 낙후된 독일 문학의 부흥을 꾀하였으며 입센, 스트린트베리, 졸라 등의 작품을 공연하고 하우프트만과 같은 작가를 발굴하여 독일 사실주의 연극 운동을 주도하였다. 영국에서는 그레인이 런던에 '인디펜던트 씨어터 소사이어티 Independent Theatre Society'를 세워 버나드 쇼 같은 작가를 발굴하였고 아일랜드의 '애비 씨어터 Abbey Theatre'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앙트레 앙트완느와 그의 '씨어터 리브르'는 당시 공연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선구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무대 위에 올려 놓았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실주의적 공연 양식을 본격화 할 수 있었다. 한편 그의 소극장 운동은 각국의 소극장 운동에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사실주의 연극이 전유럽에 정착되게 되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

19세기말 유럽 각국이 앙드레 앙트완느의 에 자극 받아 사실주의 연극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단체코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새로운 사실주의 연극 양식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이 극단은 삭스-마이닝겐 극단의 순회 공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단체코가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사실주의 뿐 아니라 여러 양식의 공연을 하였으나 그 주요한 업적은 체홉의 작품들을 무대 위에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하였다는 점이다.

체홉의 희곡은 작가의 자기 주장이나 교훈, 사상을 배제하고 있으며 플롯이나 클라이막스, 흥미를 끌만한 사건 조차 없다. 이렇게 다소 헐겁게 이어진 구성법은 오스트로브스키 이래로 시작된 러시아 희곡의 특징으로서 체홉에 와서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보통 ''심리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앙트완느가 정교한 외면적 사실주의를 추구한데 반해 인간의 내적 심리 파악을 추구하는 내면적 사실주의로 방향 전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러한 체홉의 작품들을 무대 위에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독창적인 연기법을 개발해 냈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은 궁극적으로 역할과 배우 자신의 내적 심리적 동일화를 꾀함으로서 무대를 생활 환경으로 역할을 생활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배우는 ''정서의 기억(emotion memory)''을 발달시켜 자신의 일상 생활 속의 경험 가운데서 맡은 역할의 그것과 흡사한 감정과 심리를 극중 인물에 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은 지금까지 배우 연기술의 기본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삭스-마이닝겐 극단의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으며 체홉의 작품을 형상화 하는 가운데 외면적 사실주의로부터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는 심리적 사실주의로 연극 세계를 심화해 갔다. 한편 스타니슬라브스키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현대 연기술의 기초가 되고 있는 그의 독특한 연기법을 개발해 내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앙트완느와 그의 의 영향이 이미 시든 뒤 까지도 오랫동안 유럽의 여러 극단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상징주의 연극


자연주의는 꽁트의 과학적 실증주의와 맑스와 다윈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문학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말 베르그송 등에 영향 받은 시대 조류는 과학적 결정론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자연주의의 파탄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주의의 조야한 과학적 결정론 대신 신비와 不可知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논리 대신 직관을, 현실의 추악성을 폭로하기 보다는 그 이면의 꿈과 이상의 세계를 추구했다. 이러한 반사실주의적, 반자연주의적 경향은 '상징주의'란 이름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게 된다.

연극에 있어서 '상징주의'는 사실주의 연극에 대한 반발로 부터 출발하였으며 그 최초의 반발은 사실주의 연극이 채 확립되기도 전에 일어났다. 1890년 Paul Fort는 파리에 'Theatre Mixte'를 설립하고 사실주의 연극의 조야함, 무미건조함, 추악함에 반발하여 상상과 미와 장엄함이 연극에 되살아 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징주의 연극은 주로 상징주의 시인들의 직접적인 자극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가로서 메테를링크를 들 수있다. 그는 궁극적인 현실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파악될 수 없으며 그것은 객관적 관찰이나 귀납적 추리가 아니라 주관적 느낌이나 비젼, 즉 직관에 의해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작가가 표현해야 할 것은 표면적인 현상이나 행위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내적 심리 상태와 직관이며 이는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없고 다만 상징적인 대상물과 행위를 통해 암시되어질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극은 'static theatre', 'inner theatre'라고 불리운다.

상징주의는 이밖에도 <바다에서 온 여인>, <작은 욜프> 등의 입센 후기 작품, <다마스커스로>, <유령소나타> 등 스트린드베리의 몽환극, 그리고 예이츠의 시극, 클라우델의 신비극, 로르코의 스페인 민속극 등에서 그 주된 경향을 이루고 있다.

한편 크레이그, 아피아 등에 의해 개발된 'New Stagecraft'에 의거한 상징주의 연극의 공연 양식은 전체적으로 봐서는 사실주의 연극과 같이 재현적이었다. 즉 그 내용은 극작가 내면의 가공적 삶이었으나 무대 위에서는 환상적으로 '재현'되어졌다.

상징주의는 그 주관성과 표현의 모호함으로 대중과 격리된 채 점차 쇠퇴하였으나 이후의 사조 속에 흡수되어 계속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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