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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연극

미래연극의 리허설

by Park, Hongjin 2009. 9. 28.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 ⑤

미래연극의 리허설

박홍진


  연극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연극으로 구현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 희랍인들의 머리 속에 이글거리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나 중세 종교인들의 멋진 우상숭배나 산업혁명 시대의 자연주의적 과학의 진보에 따른 보기 싫은 뒷골목 풍경조차도 연극 속에서 새로운 세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언제나 연극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다가왔으며 불멸의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매직볼magic-ball이었다.
  그러나 연극이란 매체가 갖고 있는 한계가 일반 대중들에게 인식되면서 연극의 마력은 갈수록 퇴화되어 가고 있으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연극의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수많은 신비를 낳았던 매직볼의 명성이 시대의 변천으로부터 파생된 기계 메카니즘mechanism적 매체들에 의해 가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와 TV의 진군은 연극이 이룩해 놓은 역사적 진리의 금자탑을 그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있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통한 디지털의 초고속도와 필름의 대량 복제는 연극의 대중성을 꼼짝못하게 함과 더불어 연극에 있어서의 대중성의 가능성조차 의심하도록 하고 있다. 이제 누구든지 자신있게 이렇게 말한다. '연극은 덜 대중적이다.' 연극은 더 이상 유용한 연금술이 아니다. 불면 꺼지는 바벨탑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더더구나 그 바벨탑 안에는 현자의 돌 대신에 쓸데없는 정신적 나체의 망령들이 배회하고 있다. 이제 연극은 비밀의 화원 속에 꼭꼭 숨어 있는 풀뿌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연극이란 매체의 한계란 무엇이며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황금꽃의 풀뿌리가 어둠 속에서 나와 꽃을 피울 새로운 무대의 새로운 연극은 무엇인가?

(1) 배우작가주의(Actorauthorism)

  배우작가주의 연극은 '배우=작가', '작가=배우'가 되는 연극이다. 다시말해 배우와 작가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연극이 아니라 배우가 곧 작가이며 작가가 곧 배우인 연극을 말한다. 배우는 특정한 연극 대본이나 희곡에 의존하지 않고 다만 전체적인 틀거리(공연진행 프로그램)만 쥐고 있을 뿐이며 틀거리에 상응하는 즉흥성에 의해 연극이 진행되는 것이다. 틀거리나 즉흥에 의해 창조되는 텍스트는 모두 배우의 민첩성에 의해 표출되는 행위에 종속된다. 배우는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다. 배우는 행위를 창조하고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게 만드는 자이다.
  따라서 배우의 믿음은 곧 연기의 본질이며 그로부터 정제되는 행위야말로 배우작가주의 연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배우의 믿음이 관객의 믿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인식의 배반은 배우로 하여금 현상적인 모습에 연연하도록 하며 관객에게는 섣부른 정형화를 요구하게 된다.
  배우는 작가이다. 약 6세기경 최초의 연극배우라고 알려져 있는 희랍시대의 테스피스(Thespis)는 이전의 코러스만으로 진행되던 연극을 배우가 등장함으로서 보다 극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한 전설적인 인물로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축제인 디오니서스 축제의 비극경연대회(534년)에서 우승하였으며 드라마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테스피스의 공헌은 단지 그가 최초의 연극배우였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능동적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주체였다는 사실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배우 중심의 연극에 대한 밑그림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배우중심의 연극은 즉흥성에 크게 의존한다. 공연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배우의 즉흥적 사건 창조와 인물의 역동적 재창조는 배우중심의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이후 15, 6세기 르네쌍스시대 이태리의 코메디아 델 아르떼가 등장하기까지 배우 중심의 연극은 잠시 동면을 취하게 된다. 테스피스 이후 19세기 삭스-마이닝겐이라는 근대 연출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연극은 배우와 작가의 이중적 구도에 의해 발전해 왔다. 그러나 테스피스와 같은 전설적인 인물은 배우라는 직함보다는 작가라는 직함으로 더욱 많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소포클레스, 세익스피어, 몰리에르, 괴테 등등 그 이름만 들어도 걸쭉한 괴물들이다. 이들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들은 배우중심의 연극을 단번에 작가중심의 연극으로 바꿔 놓는다. 즉흥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배우중심의 연극은 치밀하게 계획된 작가중심의 연극과의 경쟁에서 그 당위성과 필연성을 서서히 상실해 간다. 왜냐하면 플롯이 우연성을 대체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의 우연적 사건의 연속은 비논리적, 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써 받아들여졌고 필연적 사건의 진행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무대 위에서 행위하는 배우들은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을 무기로 부여받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능있는 배우들의 경우이고 대부분의 평범한 배우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즉 배우는 작가로부터 수용의 가치만을 전달받는 입장이었고 그것도 천부적으로 타고난 배우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다. 반면 머릿 속에 한 편의 연극을 상상하며 지혜의 샘을 파던 작가들에게 배우란 존재는 자신들의 생각이나 이미지, 또는 사상이나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슈퍼마리오네트(Super-marionette)였다. 누가 과연 배우를 작가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 놓았던가!
  배우 머리 위에 군림하던 작가의 위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작가는 자연스레 배우의 우위에 있음으로해서 배우의 자발적 동선을 저지하고 있다. 배우의 내면으로부터 솔직한 표출의 의지를 완전한 자연상태로 끄집어 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어야 한다. 누가 해주는 것도 해주어서도 안된다. 스스로 해야 한다.

(2) 혼합주의(Mixism)

  어떠한 연극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이성과 감정과 본능과 직관의 섞임형태로서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연극을 해야 한다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가장 현명한 답이 준비되어 있다. 이성을 자극하고 감정을 두들기며 본능을 충동질하여 직관의 세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벌거벗은 솔직하고 진실된 연극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브레히트적 지성도 아르또적 감성도 그 어떤 것도 아닌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혼합주의'이다. 세계와 인간, 객관과 주관의 통일이며 각 개체들로부터 참의 가능성들을 도출하여 섞는 것이다. 그것이 용해가 되건 혼합이 되건 간에 우선 섞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발짝 뒤로 물러나서 혼합된 것들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느낌의 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립되는 연극의 양식적 특성일지라도 화해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질적인 것들로부터 하나의 공통된 속성을 찾아 낸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섞어 보고 난 뒤의 일이다. 우선은 섞어 보자.

(3) 가상리얼리즘(Virtual Realism)

  가상리얼리즘은 가장 황당하면서도 가장 논리적인 리얼리즘이다. 가장 첨예한 과학이 바탕이 되어야 하며 초과학적인 비젼의 연구를 통해서 가능한 연극형태이다. 현재 대두되고 있는 문화적 카오스caos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반으로 활개를 치게 된다. 가상현실이란 컴퓨터의 급진적 발전에 따라 생성된 리얼리즘의 새이름으로 디지털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버라이어티 쇼variety show이다. 가상현실 속에 내팽개쳐진 21세기 인간들의 숙명적 만남은 바로 버라이어티 쇼-가상현실 속에 새롭게 존재하는 가상리얼리즘 연극이다. 그렇다면 가상리얼리즘 연극이란 무엇인가?
  이미지에서 이미지로의 순환이 하나의 공간으로서 파악되는 연극이다. 즉 상황공간이 극대화되는 연극이다.

  이미지 -> 상황 -> 이미지
느낌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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