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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연극

문제는 준비다

by Park, Hongjin 2009. 9. 28.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 ④


문제는 준비다

박 홍 진
 

  최근 연극의 세계적인 추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화이론과 궤를 같이 하는 서구연극이론의 전통적 맥락이며(주로 이즘ism으로 표출된다.) 또다른 하나는 삶으로의 여행이라는 전제아래 행해지는 인류학적 모색이다.

  포스트모던 이후 연극의 양상은 특히 스타일적인 측면에 있어서 이미지 플러스 스펙터클(볼거리와 들을거리)의 경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제의 선명성 대신에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하나의 강한 내적 흐름을 추구하는 연극들이며 주로 극장을 포기하지 않은 특출한 개인에 의해 발전되고 있다.

  반면 공동체적 집단생활을 바탕으로 한 연극은 특수한 환경 속으로 파고드는 삶과의 밀착과 종교와도 같은 신념을 가진 구성원 전체의 합의와 동의를 통해 작업이 이루어지며 집단의 약속에 의해 스스로를 통제하며 발전되고 있다.

  서로 다른 방향성으로 흐르고 있는 듯한 위의 두 경향은 세부적인 차이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똑같은 전제아래 통합되는데 여기서 전제란 바로 구성원의 '준비상태'를 의미한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즉각적으로 극적 사건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자아들의 단결이야말로 모든 진보적 연극의 기본적인 선결조건인 것이다.

  프로페셔날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을 가르는 잣대로서 '준비'란 말의 의미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프로페셜날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을 가르는 직접적인 기준이 된다. 즉 연극을 행하는 주체와 객체의 성격, 연극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차이에 관계없이 연극에 있어서의 프로페셜날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차이를 극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준비'의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얼마만큼의 부피와 깊이를 가진 '준비'인가에 따라 프로페셜날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이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점을 무시하고 제도적 연극환경론의 입장 - 대학극이냐 기성극이냐, 어느어느 극단에서 하는 연극이냐 등등 - 에 입각하여 프로페셜날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을 구분하고 있다. 잘 준비된 고등학교 연극이나 직장인들의 동호회 연극도 프로페셜날리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준비이다.

  일반적인 연극작업의 준비상태는 이러하다.

1. 연극을 같이 할 사람들의 모임이(어떠한 형태가 되었건간에) 만들어 진다. 이 단계에서는 특수한 방향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2. 작업의 구성원간에 역할이 분배된다. 여기서 리더가 결정된다. 보통 최초의 모임 제안자가 리더로서 나서게 된다.

3. 리더에 의해 혹은 리더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구성원에 의해 연극공연의 틀이 제시된다. 이 단계에서 공연작품이나 전체적인 기획안이 결정된다.

4. 연극(실제)이 아닌 연습(가짜)에 돌입한다.

0) 연습전단계 : 신체훈련, 발성훈련, 연기훈련이 진행된다.

1) 연습1단계 : 읽기(Reading)
대본(희곡)을 죽 둘러 앉아서 읽는다. 작품분석, 대사분석, 배우들의 억양이나 말투 등의 교정이 근거없는(비과학적인, 그러나 보통 느낌이나 감각이란 말로 미화되고 있는) 연출의 지시아래 이루어진다.

2) 연습2단계 : 동작선 긋기(Blocking)
전단계의 분석을 바탕으로(그러나 이미 연출에 의해 고려된) 공연공간의 실사이즈대로 앞으로 있을 공연과 거의 흡사한 환경을 만들어 배우들의 움직임과 위치 등의 동작 익히기가 반복된다. 때때로 대사와 동작의 불일치로 작품 분석의 많은 부분이 수정된다.

3) 연습3단계 : 세부묘사(Detail)
동작선 익히기가 계속되며 행동과 동작의 세부적인 묘사(관찰과 경험에 의거)가 이루어진다. 이때 대부분의 스탭진은 나름대로의 디자인을 완료한다.

4) 연습4단계 : 조화(Ensemble)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흘려 보면서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 나간다. 템포, 리듬, 관통선, 통일성 등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주입식으로 작품에 부여된다.

5) 연습5단계 : 총연습(Rehearsal)
공연과 똑같은 것이라고 가정된 연습을 한다. 이제까지 입지 않았던 공연 의상이나 분장 등을 하고 소품들도 공연할때와 똑같은 것을 사용한다. 스탭진의 제작품들과 호흡을 맞춘다.

  엄밀히 말한다면 이상에서 살펴 본 연극의 준비상태는 연극의 준비상태가 아니라 공연의 준비상태일 것이다. 2달이나 3달 가량의 연극작업에서 연극은 단 하루도 하지 않는다. 단지 연습만 할 뿐이다. 그게 당연시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이야기 할때도 연극연습한다고 한다, 연극한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공연 = 연극이라는 등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기과시적 연극작업이 자아실현이나 자기개발 등의 수식어로 치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하는 이들은 2000년 동안 그러한 방향으로 연극을 발전시켜 왔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은 연습되어지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연극이 있을 따름이다. 보는 이와 하는 이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공연에 대한 강박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자유롭다.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일상 속에서 모든 언어와 동작의 훈련이 자연스럽게 연마되기 때문에 특별한 형태의 연습방법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 행위하는 연극일 뿐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의 준비상태는 이러하다.

1.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모임 구성원 누군가의 자발적 건의와 요청에 의해 공통의 주제가 결정된다. 여기서는 주제의 특수한 방향성 보다 공동의 내적 필연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신체훈련과 발성훈련, 연기훈련이 시작된다.

2. 모임 구성원간에 역할이 분배된다. 여기서 리더가 결정되는데 리더는 연극의 진행자로서 역할하게 된다. 연극의 진행자는 연극할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3. 공동의 결의에 의해 연극공연의 틀이 만들어진다. 이 단계에서 공연작품이나 전체적인 기획안이 결정된다.

4. 연습(가짜)이 아닌 연극(실제)에 돌입한다. 즉흥적으로 연극이 진행된다.

  즉흥이란 이제까지 그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습득의 정도와 질이 순간이라는 시간의 속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단순히 즉흥, 그 자체가 아니라 축적된 습득물들의 결과물인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즉흥의 완벽한 발휘에 있다. 즉흥의 완벽한 발휘를 위해 연극의 진행자는 즉흥을 위한 테크닉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제시해야 한다. 여기 몇가지 즉흥을 위한 테크닉을 소개한다.

1. 걷기

걷는다. 기억을 되살리며 여러가지 시간적 배경 아래에서의 걷는 모습을 재현한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를 극적으로 인식한다. 서서히 역할을 바꾸어 가며 걷는다. 진행자의 신호에 의해, 또는 사전에 약속한 제스추어나 행동에 의해 걷기를 멈춘다.

2. 충돌하기

자기 스스로 고안한 특별한 진행선에 따라 움직인다. 진행선이 서로에게 방해가 되기 시작하고 어느 지점에서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충돌한다. 쓰러진다. 다시 일어선다. 움직인다. 충돌한다. 쓰러진다. 다시 일어선다. 자기 스스로 고안한 진행선의 목적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3. 싸우기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서로 싸운다. 서로 싸우는 이유와 목적은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중요한건 싸움 그 자체에 있다. 그러나 절대 육체적 접촉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 애매모호한 상태로 싸움에 임해서는 안된다. 싸움의 이유는 자신에게 명백해야 한다.

4. 흉내내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따라 하는 것과 같이 상대방의 모든 동작과 말과 행동을 따라한다. 흉내내는 대상에 몰입하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 시작하면 비로서 흉내내기를 멈춘다.

5. 말하기

아무나 먼저 말을 한다. 그 말에 관련된 내용으로 말을 이어 받는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말이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진행자가 말의 주제를 요약한다. 결론을 짓는다.

  흔히 훈련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훈련의 방법론에 의해 훈련의 결과가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즉 어떠한 훈련 시스템이냐에 의해 그 훈련의 중요성이 결정되며 더불어 훈련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며 그로토프스키의 부정법이 중요하고 브레히트의 방법론이나 다른 많은 연극인들의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방법론이든 그 방법론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필연성과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들 방법론이 탄생하게된 시간적 공간적 환경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방법론은 단지 참고사항에 다름아니다. 방법론의 내용 여하에 상관없이 얼마나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가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의 가능성에 의해 훈련이 결정되는 것이다.

  집중의 정도가 즉흥 자체에서 1주일, 1개월, 2개월, 6개월, 급기야는 1년까지 혹은 그 이상으로 증가함에 따라 즉흥성은 상실되고 잘 계획되어진 스케줄이 연극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연극방법론은 스케줄의 변용방법으로 변질되었다. 진정한 연극방법론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진실되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에 임하는 사람들의 집중도이다.

  어떤 연출가는 극단원 모두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어떤 극단은 농촌으로 바닷가로 순회공연을 다닌다. 어떤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공동으로 창작하여 공연을 한다. 왜?

  방법은 다르고 생활은 달라도 결국 연극이 가야할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연극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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