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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시

자화상(自畵象)

by Park, Hongjin 2009. 9. 30.
절망의 시간에 즈음하여
눈이 아프고 귀가 따갑고 머리가 어지러워
허무의 책상 위에 엎드려 있다

유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을 것이다

고백한다, 노예라는 것을
외로움, 고독, 물과 나무, 태양, 달과 별, 사랑,
욕망, 자만, 꿈, 책, 시계, 춤, 그림, 옷, 텔레비젼,
연극, 노래, 돈, 구름, 섹스, 조직, 시, 전화, 컴퓨터,
영화, 육체, 천국, 흙, 비와 눈, 꽃, 총과 칼, 자동차,
피아노, 카메라, 희비극의 노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추
상과 구상의 노예이다. 반복의 노예이며 절제의 노예, 전
위의 노예이며 전통의 노예이다

머리가 핑핑돌고 눈의 시선은 허공을 맴돈다
미친이의 장난질이나 환자의 신음이 비수처럼 느껴질 때
어디로 향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세상에는 살찐 사람, 마른 사람, 난장이며 키다리도 있는 법이다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
누구라고 땅을 밟지 않는가
누구라고 길을 보지 못하는가
누구라고 똑바로 걸으려고 하지 않는가

고백한다, 노예라는 것을
내 몸 속에는 아테네 노예의 맥박이 뛰며
아메리카 노예의 피가 흐르는가보다
종속의 경향, 속박의 의지가 꿈틀거린다

자연은 말이 없다
침묵하고 있다
나의 심장은 나의 동맥은 분노에 차있다
삶의 구원자는 기다려도 오지 않고
쇠사슬을 끄는 소리며 인두에 살이 타는 냄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감각은 더 이상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갖가지 소리나 냄새
그 외의 어떤 자극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백한다, 노예라는 것을
그러나 세상의 모든 그럴 듯함이
내가 지금 엎드려 있는 책상 위의 허무만큼이나 그럴듯하지는 않다
그래서 현재의 순간을 참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강렬한 모든 소망이나 기도에
사고를 역전시키는 힘이 있어서
즐거울 때가 있지만
언제까지나 조야한 자화상을 계속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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