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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책

무엇입니까? 투쟁이지!

by Park, Hongjin 2009. 10. 1.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고

원   제 : Karl Marx
지은이 : 프랜시스 윈
옮긴이 : 정영목
출판사 : 푸른숲
첫판1쇄 : 2001년

80년대 후반, 우연히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공산당 선언>이 전경의 불신검문에 걸리는 바람에 곤혹을 치른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읽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지만 그때는 마르크스 관련 서적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는 반마르크스 시대였다. 솔직히 곤혹을 치른 그 이후로는 마르크스에 쉽게 손이 가지 못했고 그래서 마르크스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은 늘 그를 신화 속의 인물로 자리잡게 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빡빡한 현실 생활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침을 구하고 있던 차에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을 집어 들게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책 표지를 보는 순간 갑자기 ''투쟁적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뜬금없음에 혹자는 웃을 수도 있겠지만 난 마르크스와 ''투쟁''을 등호(=) 관계로 생각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난 마르크스를 철저하게 신화 속의 인물로 유폐시켜 놓았던 것이다.

<마르크스 평전>은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마르크스를 조명한 마르크스의 전기서이다. 지구를 둘로 갈라 놓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상과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한 위대한 사상가의 실체를 이 책의 저자인 영국 가디언지의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프랜시스 윈은 방대한 자료 수집과 철저한 고증에 입각해 꽤나 사실적으로 기술해 나가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정치적, 사상적 측면 뿐만 아니라 때론 실수도 하고 충동적이며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생활인으로서의 마르크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딸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거나 늘 전당포 신세를 져야 했던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했던 불굴의 모습은 한편으론 쓴웃음을, 한편으론 경애감을 갖게 한다.

세상에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돈의 문제만큼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무능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마르크스의 어머니 헨리에테가 "자본에 대해 쓰지말고 자본을 좀 모았으면 좋겠구나."라고 할 정도로 무능한 생활인이었던 마르크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 필요한 돈을 벌고자 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결국 그 일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은 마르크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모양이다. 왜? 체제에 순응하지 않아서? 아니면 돈벌기 싫어서? 자본주의에 대해 그토록 치밀한 분석과 정확한 예측을 했던 마르크스 였지만 돈버는 재주는 없었던 것 같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누군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한다고 치자. 그런데 그 일이 혁명적이고 투쟁적이라면 결코 그는 돈을 벌기 어렵다. 돈이란 항상 체제에 잘 길들여질때 쌓이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마르크스는 스스로 돈의 축적을 거부하는 혁명적 삶을 살고 간게 아닐까 생각된다. 비록 그가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의 조력자인 엥겔스에게 자주 손을 벌렸을지언정 그의 머릿속에는 늘 시대의 모순에 대항해 치열하게 싸우고자 했던 혁명가의 모습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역자가 책의 후기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프랜시스 윈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원근과 명암이 제대로 갖추어진 마르크스의 초상"을 그려내려고 했던 듯 싶다. 대부분의 마르크스 관련서들이 마르크스의 사상에 무게 중심을 두었던 반면 그래서 독서에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던 반면 프랜시스 윈의 이 책은 588쪽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읽힌다. 한마디로 "독자 역시 마르크스와 함께 웃을 수 있는 마르크스 전기가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영국의 수상 헤럴드 윌슨은 <자본>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자랑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겨우 2페이지에서 멈추고 말았다. 거의 한 페이지짜리 주석이 나오는 그 부분 말이다. 나는 본문 두 문장에 주석 한 페이지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책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본>은 읽을 가치도 없으니까 엉터리라는 궤변을 늘어 놓는 것처럼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여러 오해에 대해서도 이 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1장 아웃사이더(대학시절), 2장 귀여운 멧돼지(청년 헤겔주의자), 3장 풀을 먹는 왕(파리의 열혈 혁명가), 4장 다락의 쥐(브뤼셀의 망명객), 5장 무시무시한 요귀(''공산당 선언''의 탄생), 6장 메갈로사우루스(런던의 궁핍한 지식인), 7장 굶주린 이리떼(가난에 쫓기는 부르주아 신사), 8장 말을 탄 영웅(아이들을 사랑한 아버지), 9장 불독과 하이에나(국제노동자협회 ''제1인터내셔날''의 지도자), 10장 비루먹은 개(''자본''의 탈고와 출간), 11장 광포한 코끼리(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의 대결), 12장 털 깍은 고슴도치(인자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의 총 12장이 연대기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낡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진부함이 된 오늘날 마르크스는 우리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지만 실제로 그의 사상은 늘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아 역사와 사회를 보는 변증법적 사유를 제공해 주고 있다. 비록 소련 붕괴 이후 반마르크스주의자들이 득의양양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분명 인류가 이룬 최고의 업적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진보에 대한 불온한 시각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지금,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의 인터뷰 내용은 사뭇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며 여전히 그를 신화 속에 계속 유폐시켜 놓을 수밖에 없게 한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었지만 말이다.

"무엇입니까?"
잠시 그의 정신이 물구나무를 선 것 같았다. 그는 앞에서 포효하는 바다와 해변을 불안하게 떠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했고, 이에 대해 그는 낮고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투쟁이지!"
처음에는 절망의 메아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삶의 법칙인지도 모르겠다.

- 1880년 미국 저널리스트 존 스윈턴과의 인터뷰 중에서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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