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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시

신기루

by Park, Hongjin 2009. 10. 1.

내일은 비가 올 것 같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있다.
먹구름은 서쪽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온 몸이 끈적거린다.
걸음이 무겁다.
한 발 한 발 내딛을때마다 느껴지는 철근 같은 무게감은 분명 삶의 상실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길은 끝없어 보인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아직 수십 킬로는 더 가야 한다.
걷는다는 것은 고행이다.
이미 군대 시절 행군을 통해 깨닫지 않았던가.
군대에서 가장 힘든 훈련은 유격이나 사격 같은 것이 아니다.
행군이다.
수많은 잡생각을 하며 걸어야 한다는 것, 그것만큼 힘든 건 없다.
간혹 보기 좋은 풍경도 지나치지만 감상할 시간이 넉넉치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부의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외부와의 모든 통로는 꽉 막혀버렸다.
아마도 첫 번째 상실을 경험한 직후일 것이다.
되새기고 싶은 기억은 아니다.
애써 감추고 싶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흐뜨려 놓는다.
그래도 남아 있는 잔상들...

한참을 걸은 것 같다.
잠깐 휴식을 취한다.
어쩌면 사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시절 꿈꿨던 아프리카의 사막.
그래서 조금만 더 가면 곧 오아시스가 나올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부추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아스팔트 위다.
시커멓게 달아 오른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을 뿐이다.
쓸데없는 상상은 몸을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아직도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어떤 이는 운명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실존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환상일 것이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거짓을 환상으로 환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것은 마음을 긴장시키고 마음은 곧이어 몸을 긴장시킨다.

다시 걷는다.
오랜 휴식은 시간의 낭비다.
아니 그 자리에 주저 앉게 만든다.
달콤한 휴식 뒤에는 실패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다.
하물며 고난의 행군은 오죽하겠는가.
술취한 사람이 괜한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르고 동네 양아치들이 행패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다.
빠르게 걸어야 한다.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쏜살같이 내달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만한 힘이 남아 있는 것 같지 않다.
또 오랜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데...

이 길의 끝은 무엇일까?
항상 걷는 길이지만 늘 의문이다.
오로지 신기루 뿐인 슬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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