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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연극

충돌(Crash)

by Park, Hongjin 2020. 5. 7.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문화예술축전이란 이름으로 8월 16일부터 10월 2일까지 문예회관,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국제연극제가 개최됐었다. 외국의 초청 작품과 우리나라 극단의 작품들까지 총 19개 작품이 공연됐었는데 다들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나의 뇌리에 감동으로 뿌리박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체코슬로바키아(당시 국가명) 스보시 극단의 <충돌>이란 작품이다. 8월 19일, 20일 양일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작품인데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마임극이다. 작품의 내용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마임극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교통사고를 당한 두 사람(택시운전기사 : 미로슬라브 호라체크와 트럭운전기사 : 안토닌 클레팍)의 이야기로 그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점차 회복해가는 과정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충돌> 공연사진 - 프로그램 북에서 캡쳐

“강철로 된 정방형의 세트에 흰색 커튼이 쳐있고, 침대 둘, 캐비넷 한 개, 목발 네 개가 놓여있다. 전반부에서는 두 사람이 여러 고통스러운 순간을 경험한다. 한 사람은 다리가 부러져 공중에 매달려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리에 상처를 입었으며 팔에 석고 붕대를 감고 있다. 클레팍은 목욕물 빠지는 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호라체크는 겉으로는 미련둥이 같지만 곡예사의 기교를 속에 감추고 있다. 말은 하지 않으나 세계적으로 공인된 귀에 거슬리는 소리-툴툴대는 소리, 재채기 소리, 킬킬대는 소리, 코고는 소리, 신음소리 등이 사용된다. 문제는 음식이다. 바닥이나 침대에 떨어지거나 부서져 버린다. 일시적 신체불능 상태에 적응하는 모습이 훌륭히 풍자되었다.” - 프로그램의 작품해설 中

스보시 극단은 프라하 출신 배우 세 명으로 구성된 단체였는데 아무런 소품 없이 얼굴에 흰 분칠을 하고 행위를 모방하는 마르셀 마르소류의 마임이 아니라 별다른 분장 없이 소품으로 가득 찬 상자를 사용하며 때때로 여러 소리를 내어 침묵을 깨뜨리기도 한다. 감정적인 순간에 배우들은 때로 말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데 <충돌>에서도 배우들은 자신들의 내부로부터 말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몸의 소리로 끊임없이 표현하며 인간의 신체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요즘의 시각으로 봤을때는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당시로선 마임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었음에 분명하다.

이 작품의 플롯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사고가 난다-잠에서 깨어난다-해프닝-주사를 맞는다-꿈-깨어난다-해프닝-주사-꿈-퇴원한다-사고. 급전과 발견이 따르지 않는 단순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눈 돌릴 틈 없을 정도로 집중하게 하며 재미있다. 왜일까? 그건 바로 배우의 힘이다. 두 명의 배우는 끊임없이 몸의 구석구석을 디테일하게 사용하며 몸의 언어를 보여준다. 눕고 쓰러지고 걷고, 배를 수축했다가 부풀리고, 눈알이 빠져 나올 정도록 동공이 팽창되었다가, 어느새 말 잘듣는 얌전한 충견의 눈이 되기도 하고, 사자처럼 포효하다가 쥐새끼처럼 쪼그라들기도 했다. 마치 한편의 교향곡을 듣듯,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인다. 긴장과 이완이 절대적인 조화를 이뤄냈을 때 인간의 몸이 보여주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연극은, 그걸로 충분했다. 

요즘 좋은 연극들이 많다. 좋은 극장, 좋은 무대, 좋은 무엇, 좋은 무엇, 또 좋은 무엇.... 나도 가끔은 그런 좋은 무엇의 한 일원이 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연극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를 연극판에 끌어 당긴 <충돌> 같은 감동적인 작품들이 무엇을 이야기 했으며 무엇을 가르키고 있었던 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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