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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시

허공(虛空)

by Park, Hongjin 2010. 11. 29.
두 노숙인이 소주 한 병을 걸고 내기를 한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허허라는 이름의 노숙인이 닭이 먼저라고 얘기하자
공공이라는 이름의 노숙인은 알이 먼저라고 받아친다
서로에게 이유를 묻자
얼굴을 붉히며 언성만 높인다
급기야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더니
소주를 내 놓으라고 다그친다

이들의 멱살잡이는 봉만이형이 출현하기 까지 계속된다

봉만이형, 닭이 먼저유 알이 먼저유?
아주 중요한 내기니까 심사숙고해서 대답해 주쇼
닭일 수도 알일 수도 있지
뭔 대답이 그리 흐리멍텅하오
닭이 있으니 알이 있는 것이고
알이 있으니 닭이 있는 것이란 말이여
그러니까 뭐시기 먼저란 말이유?

봉만이 형은 하품을 크게 한 번 하더니
교회에 꼬지하러 간다며 발걸음을 옮긴다

두 노숙인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이 허공만 쳐다본다
요원해진 소주 한 병의 꿈을 뒤로 한 채
내일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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