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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산문

딸딸이 족에게

by Park, Hongjin 2009. 11. 9.

딸딸이 족에게


박 홍 진

<실패한 이상주의>

시각을 달리하면 곧 드러난다. 인생의 여러 면모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은 무한히 지루하다. 시간하고의 투쟁은 필요 이상의 기력을 소진케 하고 괜히 펜이니 연필이니 하는 것들을 친숙한 도구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스모그 자욱한 하늘을 보고 땅바닥에 침뱉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섹스 이미지를 떠올리고, 유난히 날씨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루는 무한히 단순하다. 시각은 하나의 관점에서 머무르기를 좋아하고 또 그럴 때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끊임없이 생각은 멈추지 않으며 뭔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이며 해부학 실험을 단행한다. 번쩍이는 태양이나 산소를 공급하는 모든 푸르른 생명체도 언제 도마 위에 올려질지 몰라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더우기 주위의 동물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얘기를 걸고 대화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침묵의 강력한 무기를 당해 낼 수 없다. 그래서 무수한 원점으로의 회귀가 극히 당연하게 사건을 마무리 짓고 결론을 제시한다. 아무런 해답 없는 결말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인상을 쓰고 하지만 늘어나는 주름살만이 변화의 원리인양 미덕이 추덕으로 느껴진다. 행여 불현듯 떠오르는 시상은 한 두 행의 조야함만 확인시킬 뿐 언어의 고갈에 부끄러워 머리를 조아리고 반성한다. 계속 시간은 흐르고 무료하기에 시간의 경과 뒤에 미묘한 변화도 인식하지 못한다. 언제 자야 할지 밥 먹는 시간, 대·소변 볼 시간도 알지 못한다. 그저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보여질 뿐이다. 낮과 밤의 변화는 수축과 이완을 시이소의 양 끝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며 무게를 잰다. 하늘에서는 전선이 창공을 가르고 있고 그 위에 날개 달린 짐승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변화 속에 관찰하고 관망할 뿐 아무런 개입이나 침투도 하지 않는다. 무료하다. 철도의 받침목이 어느 노동자의 손에 의해서 놓여 졌는지 알기 위해 많은 고급 승용차들은 시간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아쉬워하며 의문을 품는 것은 학생들과 운동가들 뿐이다. 썩어빠질 의문이 의심이 되고 칼날을 간다. 한편에선 고급 승용차들의 경적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지고 마침내 소음이 되버린다. 귀를 막고 공간을 탈출하려 시도한다. 첫 번째 사람은 한적한 시골길 위에 서서 입맛만 다신다. 두 번째 사람은 아무 생각없이 시원한 바닷가의 갈매기를 바라보고 있고 세 번째 사람은 방에 틀어박혀 광학의 놀라운 재주를 보며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순간적인 방법은 순간에 그칠 뿐이다. 순간이 지나면 거세가 일어난다. 거세의 거세를 바라면서 거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광장으로 몸을 옮겨 보지만 방법의 결핍을 확인할 뿐이다. 어디선가 화재가 발생하면 불은 성난듯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물은 소란스레 춤출 준비를 한다. 이리저리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고 사람 타죽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 그곳에서는 차원이라고 하는 문제가 제시되고 그 문제를 풀지 못해서 축출당한다.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파악하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스친 영상에는 고요히 누워 있는 돌덩어리들, 호수의 잔잔한 물결, 책이나 구전을 통해 들은 인물들이 손가락질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교장이다. 한명의 저명한 철학자를 넘어 가듯이 삶의 정의를 넘어가는 것은 삶과의 거리를 넓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구경하는 것이다. 신생아의 세계는 걸음마에 의해 차츰 잠식되고 몸이 깍여나가는 것이다. 옷을 입는 순간 살갗은 연약해지고 옷속으로 숨어버린 나약함이 고개를 처든다. 서서히 시작되는 권태, 무료, 허무의 축제가 광란의 서곡을 연주한다.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꽹가리나 징도 좋다. 무희는 발가벗고 빙빙돌며 스트립티즈를 벌이는 남자, 백정이 도살칼로 소대가리 베고 무당은 칼날위에 서서 광인의 춤을 춘다. 신을 부르는 소리가 대지에 가득하다. 때로는 감각의 신선함이 새로운 인식의 의미를 발견한다. 열 명 중에 하나는 꼭 다른 말과 행동을 하게끔 되어 있다. 말과 행동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다수에 의해 옳은 것이 정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의견의 일치를 무시할 수 없다. 힘있는 자들이 화해하고 타협하고 협상했기 때문이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의식의 상이성이 보다 깊은 이해관계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하루는 무한히 지루하다. 어두워지면 밝아지는 곳에서 락음악이 흐르고 술이 넘쳐난다.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정조를 매도 매수한다. 너무 비싼 댓가를 치르지 않고 아주 손쉽게 육체를 소유한다. 그러한 손쉬움이 좋다. 무료함보다는.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육체의 접촉이 본능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은 고고한 학설처럼 칼보다 무서운 펜의 위력처럼 전달될 때 아연실색 기절초풍하게 한다. 거리를 두고 경계를 하며 철저한 수비나 보호자세를 취하는 조심스러움은 공격당한다. 공격하는 자가 너무 많다. 오직 공격만이 살아 남는 길이다. 마취제는 너무 오래가고 있다. 성능좋은 현대의약의 승리는 도처에 환자를 유발하게 하고 병원은 항상 만원이다. 거대한 주사바늘이 육체를 찌를 때 마음은 회복의 희망으로 위안을 삼고 간호사의 손바닥이 엉덩이를 때릴 때 아픔보다는 쾌감,성기가 발기된다. 빌어먹을 성기! 잘라버리고 싶다. 호모의 소원은 성전환수술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해한다. 이 세상의 모든 수치와 창피스러운 일들, 이상하고 미친 짓들, 바보·병신·거지의 일생, 장난감 인형에 혼을 불어넣는 주술사의 꿈처럼 아무런 의미없는 진공상태에 ‘나’라고 하는 개체를 던져버리면 세상에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해못할 것도 없다. 제로의 시작이자 마지막 도착지이다.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는 진공관유리의 투명함에 의해 훤히 비쳐지고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아이들 싸움에 불과한 허무맹랑한 망상, 장난이 근접한 분석일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예를 들어 천재작가의 시나 소설은 읽고 난 후의 하나의 이미지로 그 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천재를 따라 잡을 수도 이해할 능력도 부재한 것이 시대의 후진성이고 더이상 막연하게나마 이미지의 그림이 캔버스위에 붓을 놀리지 못하면 썩은 시체 해골냄새가 코를 막고 귀를 막고 결국에는 눈을 감는다. 화가는 붓을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코피를 흘리며 세수대야에 머리를 쳐박는다. 달에 첫발을 내딘 우주비행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라는 추측의 가능성만 남겨 놓았지만 모든 건 비밀에 감싸져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공개는 하지만 실제로는 무공개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일어나고 밥먹고 일하고 잠자는 윤회를 거듭반복하다가는 일상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것이 자연이고 스스로 꾸밈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삶인 것이다.

아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하루를 소일하다 끄적끄적 예술이란 실밥을 핀셋으로 뽑아내듯 허공에서 뽑아내 백지를 채워 나가는 몽상가나 시커먼 007가방을 들고 빌딩사이를 날라 다니는 슈퍼맨이나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삶의 마감을 준비하는 운명의 희생양들이나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결국엔 잠들어 버린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문득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겠다는 생각이 소명처럼 발화하고 뭔가 울타리를 넘어 광활한 벌판위에 야생마처럼 누가 채찍질하지 않아도 달려갈 도착지를 선명히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이윽고 자유라는 망상이 몸을 휩싸고 자위하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자신을 한심보다는 숙명처럼 오늘도 무료한 날의 시작을 알리는 경종을 울릴 뿐이다. 없는 돈 쪼개고 쪼개서 마련한 카세트의 음악소리는 고막을 찌르고 마음의 불안을 잠식시키며 노동의 소비를 암시한다. 음악이 명상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듯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사고의 깊은 유형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잠시뿐, 순간의 연속이 영원이 된다는 역설적 학설, 혹은 터무니없는 주장아래 카세트 음악소리에 광적으로 몰두하고 사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단지 노동의 낭비 노동력의 탕진은 일급 4만원의 노가다뿐만 아니라 손가락·발가락 놀리며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비지니스맨, 공무원에게서도, 하릴없이 총들고 왔다갔다 시간때우기 전쟁놀이하는 군인에게서도 발생한다. 학자나 교수는 얼굴에 걸친 안경너머로 숨어 버렸고 엘리트라고 하는 단어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 허울좋은 닉네임에 불과하다. 그럼 무엇이 남는가 하면 양상과 양상, 형태와 형태, 자기체계가 없는 무수한 주장·이론·주의, 나름대로의 시스템이 남는다. 시대의 전위는 절대의 원수지간처럼 절대적 상대나 다원성을 외치는 미래시제로 몇 몇 소수의 독점형태에 다름아니고 매점매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언어의 난해성때문에 동네 복덩방 할아버지나 미용사 아가씨는 각각 국졸에다 중졸이라 ‘세상에 어머나’하며 세상에 그런 것이 있었나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정말 갈수록 무료한 하루의 연속이다. 그래서 기껏 고안해 낸것이 결가부좌하고 머리를 텅 비우는 것이다. 호흡도 억제하고 사정도 억제하고 오로지 집중하는 것이다. 발산의 교리를 내세우는 종교는 흐물흐물 몸이 갈팡질팡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할 일 없는데 묘비명이나 써볼까하고 마음의 채비를 갖추면 문득 손에 닿는 소설책의 작가가 극구 만류한다. 그래도 왠지 00학번이 탄생되는 날 내 나이 서른 넷이라는 위기감이 가시지 않아 붓과 먹을 준비한다. 상대성이론을 벼루로 삼을 작정으로 붓과 먹만 근처 화방에 가서 구입하고 나만 아는 비밀 아지트에 보관해 둔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높고 푸르고 닿지 못하고 땅은 질펀질펀 날씨에 따라 비가 오는둥 눈이 오는둥 누구나 다 아는 변화가 있고 책장의 먼지는 털지 않아 뿌옇게 쌓였고 바퀴벌레 잡으려고 뿌려놓은 살충제 냄새는 이제 무감각해진 후각의 덕택으로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다. 정말 무료하다. 탄식과 한숨을 쉬고 있는데 때로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온다. 친구나 애인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오면 마지못해 응하는 척하지만 실은 기쁘기 그지 없다. 나무와 공기와 철로 만들어진 옷으로 갈아 입고 최근 히트하고 있는 영화 한편 본다. 뭐도 있고 뭐도 있고 별아별 이상한 얘기도 다 있구나 하면서 내심으로 영화 하나 만들어야지 생각하며 어쩔수 없는 배고픔에 못이겨 영화속의 먹는 장면만 나오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스크린에 ‘ 끝 ’ 자가 나오면 꼭 몇 몇 사람은 박수를 치고 처음에 꽉 차있던 자리가 군데군데 비어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배고파서 죽을 지경인지라 배고픔 그 자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이다. 거리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이층 까페에서 턱고이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인간의 색기지수이다. 그림의 떡을 연실 입방아 찧으며 물한모금으로 입술을 적신다. 말이 많으면 혓바닥이 닳고 입술이 부르트고 그래서 보이지 않게 상처기에 살짝 연고를 바른다. 누구에게나 짜릿한 경험이 다가오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상처에 직접적인 접촉이 일어나고 그러함으로써 자신의 위장이 백일하에 드러나 무엇보다 상대방보다는 자신의 쥐꼬리만한 양심에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오토매틱 자동차의 기어변속처럼 결국에 자동적으로 모든 것은 전화벨이전의 과거로 돌아온다. 오늘은 무한히 무료한 날이다. 그래서 달과 별이 그처럼 밝은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왠일인지 살인의 태양은 구름속으로 사라지고 대지의 피비린내는 창공위로 흩어진다. 이른 아침, 수산시장의 생선장수들은 비늘냄새보다 그들 삶의 냄새를 맡으며 거리의 환경미화원은 쓰레기의 악취보다 거리에 흘린 노력의 흔적을 밟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태양이 사라진 시각에 하루는 시작된다. 시각의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나는 끊임없이 요람속으로 요람속으로..... 마루에 걸린 벽시계의 환영이 떠오른다. 시계침과의 전쟁! 일방적으로 밀리는 힘싸움·줄다리기, 시계침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르시스. 시계침과 나와의 운동역학적 공간이동. 뻣뻣한 시계팔뚝은 훌륭한 철봉이다. 결국에 힘에 밀려 완패되고 완력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만이 증명된다.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시계유리는 날로 강해지고 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몸을 부닥껴도 끄떡하지 않는다. 언젠가 대형서점에서 곁눈으로 보았던 깨진 시계유리 파편 사진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녹초, 나를 지배한 것은 탈진의 모습이고 녹초가 되어 버린다. 전쟁에 패한 자는 승리자에게 몸을 바친다. 1초에서부터 60초 시간의 분수령 세월의 산마루에 올랐다. 수없는 바위의 낙하가 이어졌고 육체의 갖은 에너지 덩어리가 고갈되자 산정상에서 외치는 메아리는 공명되지 않는다. 기능장애는 기능이 많을수록 손쉽게 일어난다. 꾀꼬리를 벗으로 삼기에는 유혹의 미끼도 없고 인간과 동물간의 통신수단에 대해서도 연구하지 않은지라 애당초 두손들고 다만 현대가 가르쳐준 효과적인 때로는 유용한 합리적 트릭을 이용해 전파를 보내야 한다. 힘줄과 심줄로 송수신할 수 있도록 고안한 텔레파시가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 곁에는 장난감 무전기 워키토끼가 쫑긋쫑긋 뒹굴고 있을 뿐이다.

오늘 이야기는 내일을 예언한다는 인과론적인 법칙성에 따라 살아가기보다 순간의 영원성을 신봉하여 시제를 막론하고 지금만을 삶으로 인식한다.

허무를 허무를 넘어서는 의미로 전환시키기 위해 찰나의 만족속에서 요령피우는 주의의 산물, 소일한다. 가능성의 모색이나 선택의 폭을 넓히려는 소일은 예전에 천재들이 즐겨 이용하던 방법론이자 불후의 원칙처럼 하나의 원리로 부각된 역사적으로 맥락을 거슬러 올라가면 뿌리가 명백히 존재하는 교류제이다. 감정이입이나 몰입을 통해서 상호일체감을 느끼는 나와 모든것과의 교류이다. 걸으면서 360도를 살피고 유별나게 관찰력을 편애하여 닳도록 낭비하는 것은 노동력의 정당한 댓가로서 보상받으려는 일상의 기도이다. 택시안의 운전기사의 무사함을 바라는 소녀의 기도나 교회나 사찰에서 머리조아리고 중얼거리는 기도나 하릴없이 소일하는 순간의 영원에 대한 기도나 같은 선위에 정렬하고 있는 제식이다. 워키토끼가 사용자를 잃고 옆에서 뒹굴거리고 있건 무선전화기의 신호음이 끊이지 않건 컴퓨터의 모니터가 계속하시겠습니까? Y/N을 강요하건 제식의 필요성은 날로 증대할 것이다. 신비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시대가 다가왔고 신비주의와 더불어 반신비,비신비주의가 같은 몫으로 자리를 차지한 만큼 이쪽저쪽으로의 열망과 갈망만이 시대를 점유하고 있다.

열망과의 투쟁이 필연성으로 부각되면서부터 이제 눈앞에는 죽음이라고 하는 영역이 펼쳐진다. 광대무변한 무한의 사막에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 소외일지도 - 아무런 의식없이 그렇다고 무의식이니 잠재의식이라고도 정의할 수 없는 미해결의 존재현상으로서 분명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지는 공포를 자아내는 원칙 그래서 투쟁을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열망하고 열망. 모든 세상 흐름과 세상이라는 거대한 수류가 궁극적으로 한데 모여 저수지를 이루는 곳에서 소일한다. 성속의 합일을 추구하고 죽음의 문제에 답을 내리고 참회와 반성의 고해성사를 실현하고 불타나 예수와 같은 종교에 대한 상념이 곁가지를 틀면 확신에 찬 안색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실제로 양손에는 잔 돌부스러기가 손을 더럽히고 있을 뿐이다. 이때 생명을 확인해 보자. 호흡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맥박도 정상이다.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의 붙어 있음에 대한 음미 음미. 실제로 생은 일상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을 음미하는 일련의 과정에 다름아니다. 생명의 호흡소리가 대지속에 울려 퍼질 때 만물이 일체가 될 것이라는 모호한 추상, 추상속에 몰입하는 것이 관념의 태동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소일은 관념의 생산방법이다. 일종의 비생산적 실천행위인 소일이 관념을 생산함으로서 당당하게 생산을 위한 실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언어조합의 아이러니는 세상 모든 이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에 적합한 사이즈를 갖는다. 지나치는 버스속의 어느 한 여자가 우연찮게 눈에 뜨이고 사랑이니 그밖의 우아하다고 여겨지는 낱말로서 성충동, 정욕을 정의내리고 자리를 박차지만 인간의 뜀박질은 버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경제력의 부재는 생산과 소유의 낭만적 갈구, 열망을 발화시킨다. 열망 열망 열망을 떨치려는 날개짓은 열망을 더욱 공고히 한다. 잠깐 잊어버린 순간적으로 망각의 강을 표류하다 제자리로 돌아오면 버스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성적 자태가 떠오르고 솟구치는 발기와 경제력의 후진성 더 정확히는 부재에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소일을 끝내자. 죽음을 예견하며 앞에 다가오는 사자의 영령이 참여의 미학을 부르짖는다. 삐-삐, 나를 찾는 신호음. 환각,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우리 의식의 시작과 끝을 동의하고 알려주는 표시 깃발이 꽂혀있는 곳에서부터 곳까지, 만세! 환각이었다. 환청이었다. 모든 지루함과 무료함과 소일과 열망과 이제 막 깃든 내용 모두. 생생한 감각은 환각에 의해 가리워지지 않는 것이다. 가리워지는 것은 현실에 남긴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는 불필요한 기우, 미신에 불과하다. 정처없이 떠돌다 마침내 터잡기 위해 방사하는 사고의 끝은 종말이 기약되지 않은 유야무야의 결정체이다.

누가 누구한테 맞고 누가 누구를 때리는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터에는 항상 호기심많은 사람들의 원이 그려지고 싸움을 부추기면 기세등등 누구는 맞고 누구는 때리고는 한다. 언제까지나 방관자는 히죽히죽 미소짓고 좀 더 강렬한 원색의 힘을 상상을 동원하여 앞에 펼쳐지는 상황에 부여하고자한다. 번쩍 눈이 뜨이고 스치는 격앙의 앙금, 즉 모든 결과는 순간의 결단에서 연유한다. 앙금을 풀어 헤쳐야한다. 그래서 현위치를 박차고 싸움터로 돌진한다. 나는 존재하고자 한다. 동물적 본성이 솟구치고 존재라는 미망이 온몸으로 체현되는 원시시대의 행위 원시인의 본질이 다가오는 세기를 시간을 지금 찰나의 전후를 단지 몸둥이 들고 누구를 때리고 누구는 맞고 자빠져 살 찢어지고 피흘리는 도살판에 뛰어듬으로 해서 연유한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누구는 먹고 살고 무기상인·군인을 주 고객으로하는 창녀, 불량배·집정에 불안을 느끼는 정치수뇌가 인육의 정육점을 차리고 속 훓은 돼지마냥 갈고리에 걸어 전시 전시. 사람들이 어디서 모여들고 전시회의 성황속에 초대작가는 갈채를 받는다. 그게 꼴보기 싫어서 왕래를 자제하면 여러가지 유혹으로 손짓, 발짓, 질알발광. 정말 한없이 무료한 날이다. 자유와 경쟁이 한데 어울려 부르스의 반주가 되며 죄인의 예술이나 문학이 아닌 양심이 스스로에 의해 드러났다고 트랜지스터 혹은 IC가 발표한다. 뉴스는 새로운 소식이다. 어떻게 보면 새로워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나 윤회 반복의 메카니즘이 오늘날 뉴스가 안고있는 문제아닌 숙명이다. 사양길에 접어든 뉴스 그 자체, 새로운 뉴스는 없다.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매체의 스피커는 끝없이 리와인드 전쟁, 자유, 민주, 양심, 부정, 폭로, 평화, 살인,,, 그 말이 그 말 같다. 시선을 돌려 본다. 홍수 자동차, 황색 물결, 푸르게 푸르게, 콘크리트 철근, 멀건 대낮이 그 자체의 색으로 빛난다.

그래서 유는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걸음걸이하며 옷맵시하며 무엇보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변화의 기층을 이루는 힘이 무엇인지 당혹스러움과 함께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줌렌즈의 십자선이 투사체의 중심에 겹쳐지면 대상은 렌즈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낡아 빠진 저기능의 렌즈라면 자꾸만 의도와는 다르게 오조준하고 깜빡 실수하여 시력이 나쁜 탓도 있겠지만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단순한 착각이 엄청난 난도질이 될 줄이야 누구나 조금은 상상하고 예측한다. 예측에 실패할 경우?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제적 의미가 수반되는 물질적 관계로서의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뭔지 모를 기운에 의해 - 보통 느낌이라고 혹은 정열이라고 명명된 - 생성되고 이끌리는 분위기의 지배적인 감정상태로서의 그것이다. 유는 의도적으로 전자의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왜 그러냐하면 유의 내부에서의 전자와 후자의 전쟁은 이미 전자의 승리로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 하는 핵탄두는 리얼한 무시무시함이다. 그러나 유는 후자에서 이상을 본다. 그래서 불구하고 다른 많은 편의에도 불구하고 집착할 수밖에 없다. 유가 의도적인 것은 미래의 불확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일뿐 유의 언어와 태도변화는 본질적인 전이작용이 아니다. 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말과 행동에 진심을 싣는 것이다.

엄청난 출혈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더욱 절망적으로 흐르고 있다. 절망의 나래짓 나래짓 날개짓 ㅈㅓ ㄹ ㅁ ㅏ ㅇ. 그것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가슴에 뭔가를 채우기 위해 마개를 열면 절망의 허망한 구렁텅이에 아가리를 벌리고 내용물을 보자니까 콧물, 꾸정물, 똥물, 좃물 유쾌하지 않다.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시궁창속으로 첨벙첨벙. 밧줄을 던져다오, 살려주세요! 유에게 유에게... 이제 절망조차 유희할 수 없다. 오직 살아있음, 존재하고 있음. 감사뿐. 누가 누구에게? P가 G에게

눈물이 나는 날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나 있고싶지 않은 곳에 있어야만 할때 가고싶지 않을때 가야만 하는 처지가 문득 스스로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눈물이 저도 모르게 뺨에 흐를 때 전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그래야만 되겠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없습니다. 필시 어디선가 듣거나 보왔던 까닭일 것입니다만 저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게 됩니다. 요즘 저의 중요한 행사중 하나는 하루에 한번은 하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술을 마셨습니다. 매일 마시는 술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많이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의문이나 해답을 생각하기보다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자 해답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어쩌면 제 사고의 한계인 기쁨에 젖어 마셨던 것입니다. 내일도 술을 마실 작정입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어제밤 저는 홀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머리속에는 술을 마셔야겠다는 마시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일에 슬퍼하고 관찰한 것이나 기관에 접촉되는 감각에 아파하면서도 어김없이 똥을 쌌으며 오줌을 누었습니다. 휴지로 밑을 닦으면서 왜 세상에는 억압이라든가 복종이라든가 하는 이상한 습성들이 있어야만 하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저는 지금 술을 마시러 나갑니다.

마치겠습니다. -끝-

3년간의---------------------------------------------------------------------------------------------------------------------------------------------------------------------------------------------------------------------------------------------------------------------------------------------------------------------------------------------------------------------------------------------------------------------------------------------------------------------------------------------------------------------------------------------------------------------------------------------------------------------------------------------------------------------------------------------------------------------------------------------------------------------------------------------------------------------------------------------------------------------------------------------------------------------------------------------------------------------------------------------------------------------------------------------------------------------------------------------------------------------------------------------------------------------------------------------------------------------------------------------------------------------------------------------------------------------------------------------------------------------------------------------------------------------------------------------------------------------------------------------------------------------------------------------------------------------------------------------------------------------------------------------------------------------------------------------------------------------------------------------------------------------------------------------------------------------------침묵

똑같은 시간에 두 여자가 있습니다. 한여자는 대한민국전도의 중심에 서있고 다른 한 여자는 중심이 아닌 그 어딘가에 서있습니다. 중심에 서있는 여자를 보면 제일 먼저 비웃음이 떠오릅니다. 반면에 중심이 아닌 그 어딘가에 서있는 여자를 보면 한없이 슬퍼집니다. 나의 손은 두개입니다. 그래서 한손씩 양쪽으로 내밀어 두여자의 손을 모두 잡고 싶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나의 두손은 모두 중심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왼손! 그러지마.” “오른손,넌 왜그래.” “두손 다 떠들지마!” 진심에 대한 변명은 항상 이런식으로 막을 내릴 뿐입니다. 친구 K가 자살하면서 유품으로 내게 빌려준 산소마스크가 친구를 대신하여 나를 조롱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나와 똑같은 몸의 경향에 괴로워하다 두손을 잘라 버린데다 두발이 똑같은 증상을 나타내자 두발 마저 자르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마침내 두귀를 자르고는 두콧구멍까지 틀어 막고 끝내 자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친구 K에게 산소마스크가 왜 필요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인 나보다는 더욱 쓸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산소마스크가 별 쓸모가 없는 내게는 엉터리같은 대접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한 이상주의”가 실패한 뒤 허무의 책상위에 엎어져 있던 펜이 다시 들린 데에는 치열함의 공적말고도 3년이라는 시간의 각인이 되어버린 케케묵은 퇴색을 아무 저항없이 제거할 수 있게 도와준 산소마스크의 쓸모 덕일 것입니다. 이젠 내게도 산소마스크가 아주 조금은 쓸모가 있어진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뭔가가 유용되어 질 수 있다는 것만큼 존재의 의미를 값나가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조롱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산소마스크가 친숙한 태도로 내 행동범위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결국 가치의 인식을 인정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산소마스크라는 존재의 긍정적 요소가 내부에서 꿈틀거립니다.

기억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하는 모든 활자화행위는 깨끗해지려는 기록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소각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 결말의 진정한 의미는 미완의 불량스러운 긍정의 부정! 그래서 사고를 역전시키는 것입니다. 삶의 당위성이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무거운 짐을 자처하고는 살아 나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짐을 떨구어 내는 작업! 최후의 순간에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었다”라고 선언할지라도 모자람없이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동반자적 성격도 여기에서 위안을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서 있는 여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위치변경의 의지가 없다기 보다는 부자연적 환경조직이 의지의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유무 이전에 그러한 논의의 필요성이 불필요한 겁니다. 여하튼 서있는 여자들의 위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위치 또한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역전시키기 위해 더욱 힘을 낼 것입니다.

거리에서부터 시작하자.

생활이 보다 기계화될수로 보다 뚜렷해 지는 것은 눈앞의 거리일 뿐이다.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거리에의 직면. 거리는 분명 삶의 상징문구이다. 그래서인지 거리엔 항상 수많은 기호들과 꼬부라진 활자들이 넘쳐 흐르고 있다. 199모년 모월 모일의 역사는 어두운 거리로 뛰쳐 나온 박의 꿈이다. 그러나 기계적 영상미로 박을 인도한 것은 길거리 땅콩X의 미학이 아니라 단순한 배고픔이다. 살기 위해 박은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원시인들이 그들의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사냥과 수렵으로 키워 왔던 부풀어 오른 가슴처럼 박의 가슴 또한 넓디 넓은 것이다. 뭔가 남자구실을 해야만 한다. 여자 발바닥의 때나 핧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해서 박의 꿈은 거리로 뛰쳐 나왔고 여러 원소들과 혼합되어 버린 것이다.

박의 결정은 갑, 을, 병, 정 모두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에게 그러한 결정이 가져다 준 기쁨은 박의 슬픔만큼이나 큰 것이다. 박에게 있어서 여자는 단순히 성별기호로서의 색정적 신호체이상의 전행동을 지배하는 힘이기에 대단히 힘든 과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박은 살기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슬픔의 증거는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삶에의 승복!

1

당장 급한 것은 세속과의 이질감을 하루속히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살기 위한 움직임 자체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박에게 끔찍함만을 요구하는 괴물에 다름아니었다. 항상 그 언제부터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탈하려는 경향의 시작, 좌익의 시초. 살기위해 원시인들이 공룡과 싸웠던 것과 같이 이제 박은 세상이라는 괴물과 싸우기를 선언해야 한다.

사고 자체를 중지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에 찬 명상가나 사고의 유희에 도취해 노려보는 사상가나 투쟁 투쟁, 삶과의 투쟁. 박의 선언은 그래서 의미있는 것이다. 세속과의 이질감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과 삶과의 투쟁을 선언해야 한다는 두가지 당위성의 충돌과 비열한 해결이 비젼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2

내가 지금부터 세상을 얼마만큼 치열하게 사는지 가르쳐주지. 이것은 깨끗해지려는 기록, 기억의 기억을 더듬으며 모든 더러운 것을 소각시키려는 시도, 그래서 또한 치열하다. 투쟁이라고 했지, 이전의 역사가. 순간에서 영원으로 지구에서 우주로 현실에서 이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장애물과의 투쟁. 그러나 투쟁이 아니다. 맹목적인 치열일 뿐이다. 단지 더러울 뿐이고 그래서 일련의 조치가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자. 결단을 내리고 머리가 째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입력장치의 회로를 검사해보자. 기판위의 부품은 정상이고 출력장치와의 연결도 이상없다. 지극히 정상이다. 결국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칼을 들이대는 것이다.

내 치열함의 제1부는 눈물이다. 허공속에 날려보낸 수만량의 눈물, 흘리고 또 흘린 그리고 지금도 흘리고 있다. 눈물, 아픔, 미칠듯한 고통. 그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나는 혼자였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눈물이라는 액체가 흘렀다. 감각의 무딤보다 눈물흘리는 것이 더욱 슬픈 것이다. 남들은 내가 슬픈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 그럴까?

기억의 기억을 더듬으면 눈문 흘린 것이 기쁨이었다. 꿈이다, 추억이다. 세상살이의 막중한 짐을 얹는 것은 환상이다. 여자친구에게 투철함을 이야기한 적이 있고 군인이 되어 나타난 친구에게 삶의 계략을 성실함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고 때로는 뭔지 모를 나에게 참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때 그때의 나를 후회한다. 치열함이 치열함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충의 내용은 이러한 것이다.

“나의 이름은 더하기 빼기 제로. 창녀 젖가슴에 코박고 살다가 어느 순간 공주 앞에 쨘하고 나타나는 것, 그게 꿈이지. 뭐가 잘못 됬나?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의 이름은 좌와 익의 조합. 내꿈은 깨끗한 여자와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죽는 것. 뭐가 잘못 됬나? ”라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박은 달리 할말이 없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도대체 판단이 서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박의 두 손은 모두 들어 올려져 있고 박은 양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역사의 승전보는 누구의 편에 서서 울려올 것인가?

오른쪽 - 그 광대무변한 피안의 끝에는 거리의 매춘부가 살고 있었다. 무시못할 리비도의 솟구침은 왼쪽 - 그 변화무쌍한 혁명의 깃발아래 살고 있는 비너스의 유방을 움켜 잡는 이데아의 수순을 삼켜 버리고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느 도시 어느 거리 어느 뒷걸목의 냄새나는 정육점의 쇠고리에 박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미칠듯한 빨리기는 어느 순간 육체의 더러운 꼴만을 증명한체 중단되고 이제 어슬렁거리며 밤거리를 쏜살같이 내닫는다. 잊기 쉽고 잊고 싶은 것은 하루에도 수십번 망각의 강을 건넘으로해서 잊혀지고 머리속엔 숙명의 데이터만이 남아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뭔가 돈이 되는 일을 해야지.” 박은 지금 길거리 보도블럭 위에 오줌을 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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