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쓴 글/연극

시대별 한국 연극의 흐름과 특징

by Park, Hongjin 2009. 10. 23.
출처 : yes24
한국 고대 연극의 개념과 그 기원은 아쉽게도 서양 연극의 그것처럼 분명하지 못하다. 연극은 본래가 충동예술의 하나로 그 표현 수단으로서 우리의 육체 이외에 성음과 동작을 필요로 한다.
삼국 이전의 연극은 문헌이 아주 적어 그 연원을 찾을 길이 막막하다. 그러나 연극의 기원은 제천과 사신의 의식에서 백성이 함께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놀며 그것을 큰 명절로 삼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삼국 시대의 연극은 각 나라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서역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불교와 그에 따른 제반 예술로 발전하였다. 가면을 이용한 사자춤, 북방 계통의 괴뢰희가 있었다. 백제는 남중국이나 서역 등에서 예술을 수입하여 일본에 전파하기도 했으나 국력의 쇠함으로 인해 문헌이 미흡하다. 신라는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겠다. 통일 이전의 것으로는 순수한 국풍의 가악을 향가라 하였으며 무악과 극적 요소를 담은 극희에 대해선 향악이라 불렀다. 가악은 보통 노래 위주로 춤이 이에 부가되었던 것 같으나 향악은 전연 대사와 노래가 없는 무묵극 내지는 골계희 였던 것으로 본다. 통일 전후의 향악과 가면무극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
"검무"는 화랑 황창의 용감한 죽음을 칭송하기 위해 가면을 만들어 쓰고 추던 춤이다. "무애가무"는 원효대사가 대중에 대한 포교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고제가면인 탈바가지와 가무를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 본다. "처용가무"는 처용 신화에 의거한 것으로서 신라에서는 처용이 일종의 문신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데 처용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가면극 내지는 굿으로 우리나라 모든 가면극의 총칭 처럼 되었다. "오기"는 신라말의 대표적 향악잡희 중의 하나로 금칠한 공을 공중에서 돌리는 '금환', 곱추춤으로 추측되는 '월전', 가면극의 일종인 '대면', 꼭두각시 춤인 '속독', 사자춤인 '산예'의 5가지 기예를 통칭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삼국의 연희를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된다. 고려는 불교 중심의 국가로 샤만적인-벽사의 의미인-굿이 성행했다. 또 서역과 중국에서 들어온 놀이까지 포함하여 양적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았으나 독특한 극예술의 발전을 기대하기 이전에 골계와 희소본위의 촌극으로 시종일관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팔관회와 함께 숭상되던 연말의 나례는 벽사의 굿으로 영춘송동의 의식, 송구영신을 비는 의식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의식의 거행을 위해 국가에서는 병장방이라는 나례청을 두고 있었다. 산대잡극은 나례, 나희로 발전하면서 있었던 잡극 중의 하나로 산대란 가설 무대를 말한다. 또한 그 당시에는 무격 놀이가 성행했으며 팔관회는 가무백희 위주였다. 고려의 연극은 주체성 없는 일시적 외래희와 가무잡극이 주를 이룬다. 고려의 "처용무"는 벽사의 굿과 관련이 있는 나희여서 나례와 나희 중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인형극'이 있었고 일종의  동물인형극인 "만석중 놀이"가 있었다. 여기서는 만석중 만이 사람 모양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짐승으로 연등을 밝히고 노는 일종의 그림자극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외에도 외래희의 하나로 "서호의 잡극"이 있는데 불을 뿜는 토화희, 검무의 일종인 탄도희 등이었다.
한편, 고려시대에 창우와 광대가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되었고 그 접대가 매우 대단하여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얻었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적인 배우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조선시대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전기는 임란 전후, 선조때 까지로 한정하였다. 채붕산대 나례가 있었는데 채붕산대를 가설하고 놀았던 것은 일찌기 고려의 풍속으로 여기서 채붕산대란 산대에 채색과 장식을 단 것을 말한다. 나라에서는 산대도감을 두어 이를 감독하고 그 시설 일체를 주관하도록 하였고 주로 제사나 외국 사신 접대시에 채붕산대하여 나례를 베풀고 잡희백반으로 이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 점차 그 이외에도 실로 다양한 목적에서 연향을 행하게 되었다. 한가지 예로 세종조의 계동대나의는 진자 48인이 가면을 쓰고 방상씨 4명 또한 황금사목 가면에 곰가죽을 입고 방패를 들고 나와 춤추며, 창사들과 함께 행진 화답하는 모양이었다.
한편, 이러한 계동대나의의 풍속과 함께 때와 철을 가리지 않고 있었던 조선조 초기의 채붕산대놀이 중에는 전래 놀이인 처용무와 백희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전래의 놀이라 하는 것은 고려 전래의 화희와 폭죽놀이를 비롯하여 나희와 더불어 있었던 필수적인 놀이인 처용무를 말한다. 그리고 백희 또한 나의 후에 반드시 따르던 일종의 잡희 잡극으로 나중에는 나례와는 별상관없이 영사 혹은 신감사 영접 때나 연락환오 할 때는 언제나 행해지던 중요한 놀이였다. 어마어마한 가설 무대 장치 위에서 무등춤, 땅재주, 마상재, 줄타기, 죽광대놀이, 사자와 코끼리춤, 학춤 등을 하는 것이 백희였고 많은 종류의 촌극도 유행했다.
조선 중기에는 전쟁으로 나라가 황폐하고 흉년까지 겹쳐서 백성의 픽박과 궁핍이 심해져 세말나례의 풍속이 사라지게 된다. 또 성리학 배척과 실증적인 학문의 주장으로 실사구시의 이념이 정립되자 평민에 의한 문학과 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그 시기에는 우선 채붕산대 나례가 해산된다. 그 이유로는 오랜 전쟁과 그 피해로 인한 백성의 원성과 나라의 경제적 긴축재정에 대한 감안으로 실질적으로 청사를 섬길 명분을 잃어버렸다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이렇게 되자 채붕산대를 주관하던 산대도감 또한 자연히 해체되었고 그 산하에 있던 재인들이 호구지책으로 시골을 유랑하게 되고 그들은 근세 민속 가면극에 직접 혹은 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근세 민속가면극과 꼭두각시극의 성립연대는 불분명하나 둘 다 실학운동과 평민사상 및 그 정신의 소산인 것은 분명하다. 지방의 대표적인 탈춤으로는 우선 양주 '산대놀이'와 봉산, 해주, 강령 '탈춤', 그리고 경남 일원의 '오광대' 및 '야유', 경북 안동하회의 '별신굿', 함남 북청의 '사자탈춤' 등이 있다. 이러한 가면극들은 모두가 대사보다는 동작, 동작보다는 묵희, 그리고 가창무극으로 시종하고 있다. 그 대사와 동작 또한 상스러우며 외설적인데가 많고 노래는 일종의 창이며 춤은 주로 침묵과 활달함이 교차하여 그 움직임의 폭이 또한 넓고 길며 강렬하기 그지없다. 탈춤의 인물은 희화화되어 있으며 극중에서 신분 상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다. 주인공은 하인배로 내용은 대부분이 양반 사회를 풍자하거나 파계승을 조롱하는 것으로 시나위나 굿거리 장단이 돋보인다. 대체로 탈춤은 전통적인 가면을 사용치 않고 극을 마친 후 의상과 도구들은 태우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꼭두각시극은 일명 '박첨지극'이라고도 부른다. 인형이란 형이상학적인 한 인간의 환영에 불과하므로 인형극 이야말로 그 사회적 실상과 허망한 자기네의 존재를 연극으로서 형상화한 하나의 차원 높은 예술이라 하겠다. 인형극의 기원은 종교적 의인화에서 비롯되며 근세 조선의 꼭두각시극은 유래와 내용이 가면극과 유사하다. 단, 내용이 한결 이해하기 쉽고 사실적인데 그 당시의 풍류사상과 무당의 행실 및 승려의 타락, 도교의 전래와 한 가정의 처첩 관계 및 본처 학대, 양반에 대한 풍자와 모욕에의 역설적 처리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선 후기는 영, 정조 이후의 시기를 말하며 그 시기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판소리'를 들 수 있다. 판소리는 독연 형태의 광대에 의한 극예술로 광대놀이 중의 중요한 레퍼토리였다. 판소리꾼은 거의가 무가 출신으로 그 발생은 제의에서 비롯되어 이후 오락으로 전용되는데 농어촌 대중의 전설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수의 추임새와 함께 소리와 아니리와 발림과 춤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판소리는 엄격한 의미에서 연극이 아니라 서사시 이지만 연극적 성격이 매우 두드러진다. 이후 분창 형식으로 발전하여 협률사 공연시에는 1인 1역의 창극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대로 넘어오면 그 초창기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이 바뀌던 그 시기로 협률사와 원각사 등의 극장이 생긴다. 협률사는 고종 황제 등극 40주년 친경예식의 준비 기관으로 궁내부에 설치되었다가 예식의 연기로 인해 그 기능이 점차 일반 오락기관으로 변모하여 최초의 옥내 극장이 된다. 이후 협률사는 없어지고 그 자리는 다시 국립극장으로 원각사란 명칭을 붙여 운영했는데 여기서 판소리를 처음으로 무대화 했다. 우리는 초창기의 연극을 신파극이라 부른다. 이는 1910년대에 한일합방 이후 일본에서 상륙한 극이다. 한일합방 이전까지는 아직 구극의 잔존시대였고 한일합방 이후로는 신파극이 들어와 구극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며 불명확한 개화사상과 민족적 비애가 그 내용으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시대 정신의 착오와 맹목적인 외래 연극 모방의 결과를 낳아 국적없는 연극으로 귀속되고 만다. 결국 1920년대 이전의 한국 연극은 일본 신파의 모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없었고 따라서 이 시대 연극을 구습에 기인한 인종의 비극, 인종의 연극 사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는 우리나라 연극 운동의 일대 전환기로 국내의 창작극 및 해외의 이름난 작품들을 번안하여 무대에 올렸다. 그 시대의 작품 경향은 구시대인 봉건적 사회 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근대적 감각에 호응하려는 기운이 농후하였다. 그에 따라 노골적인 계몽극과 상업주의적 연극 내지는 사실적 연극으로 방향을 달리하고 있던 때였다. 1920년대를 대표할 극단으로는 토월회가 있다. 토월회는 한국 신극 운동에 획기적인 역할을 다한 극단으로 일본에서 유학생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들의 이상은 "현실에 토착해 있되 이상은 명월같이 높게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토월회란 명칭도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토월회는 민중계몽을 위한 신극 활동을 했으나 점차 시대의 타성에 젖어 창작 및 번역극 소개에 있어 판단없이 소개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1920년대의 연극은 한국 연극에 어떤 자주성과 개성이 의식면에서나마 태동한 시기로 계몽적인 면에 있어서는 노골적인 구세대와의 갈등을 보였다. 그러나 배우와 관객은 미처 그 근대적 극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1930년대는 1920년대의 혼란에 대한 정리와 성숙의 연극 운동기라 할 수 있다. "극예술연구회"로 대표되는 1930년대 연극은 이념과 목표가 순수하여 '현대 문학의 성숙기', '순수 문학 주류시대'라 하겠다. 극예술연구회의 목적은 반드시 연극 뿐 아니라 문학 전반에 걸쳐 구미의 신문학을 소개하는 한편 연극 운동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연구극을 대상으로 했다. '한국의 신극 운동은 새로운 번역극의 소개와 창작극으로부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처음부터 순수한 실험 본위의 연구 단체로 출발했다. 정인섭은 극예술연구회를 "학술적 토대 위에서 세계의 극예술을 연구하여 한국 연극의 신발족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동인들의 모임"이라 말하고 있다. 극예술연구회의 경향은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에는 사실적 경향의 작품을 주로 했고, 2기에는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낭만과 애정주의로의 도피를 보이며, 3기는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그 방향을 수정해 나갔다. 신춘 희곡 현상 모집으로 극작가 양성에도 기여한 극예술연구회는 다음에 올 그 준비기간으로 그 시대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토월회' 이후 우리나라 신극 운동상 처음으로 지성인의 결합이고 지성인의 자각리에 이루어져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결국 이때에는 우리 연극 사상 처음으로 신극다운 신극 작품, 그리고 주체성과 현대성이 있는 작품이 나온 시기였다.

그 이후의 시기는 "조선 연극 문화협회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의 국민총력 정책에 따라 우리의 많은 극단들이 1940년 그들의 강제에 따라 "조선연극협회"를 결성하게 되고 또한 그로부터 일본의 전쟁 완수를 위한 굴욕적인 연극 활동기를 말한다. "조선 연극 문화협회"는 일본인 감독하에 모든 한국의 연극 단체를 흡수할 것과 그 산하에 두어 그들 전쟁의 도구화로 만들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 협회는 순수한 자유주의적 경향의 단체를 탄압하여 자진 해체 선언하게 했고 강압적으로 충성적 단체를 결성케 했다. 그리고 문화 통제의 실시로 우리말 사용 및 사용 연극 통제로 중앙 극단의 자유 흥행을 금지하여 서구적 자유주의 연극에 대한 정신적 청산을 강요하고 국민연극이란 새로운 표제하에 연극을 공연했다. 그들은 중앙에서는 연극 경연대회를 열어 모든 극단을 포섭했고 지방에는 이동 극단을 순회시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과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보국정신을 함양시키려 했다. 결국 이 기간의 연극은 한마디로 무의 연극이었고 암흑과 굴욕의 연극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연극은 또다시 혼란에 빠져든다. 공산주의의 대두로 좌, 우익으로 맞서는 양상을 보였고 대한민국 수립 당시에는 황폐한 극계에 관제흥행이란 것이 형성되더니 1949년 한국연극학회가 결성되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립극장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6.25와 함께 다시 철퇴를 맞은 연극은 1960년대로 접어들며 참된 민족연극이란 기치아래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진정한 한국 연극의 방향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 장한기 선생님의 <한국연극사> 요약, 정리.
반응형

댓글